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일본 제국 육군 (문단 편집) == 인원 선발 == [[건군기]]에는 [[조슈]][* 오늘날의 [[야마구치]]현.] 출신들이 독점했으며 [[장교]]를 기존 일본의 [[사족]] 개념으로 파악했다. [[일본육군사관학교]]가 생기면서 육균유년학교를 거친 뒤에 [[사관학교]]에 들어가 교육을 받은 뒤 장교로 임관하거나 육군교도단(陸軍敎導團)을 거쳐 [[부사관]]으로 임관한 뒤에 육군사관학교로 가는 것도 가능했다. [[1917년]]에는 준위후보자(후보생), [[1920년]]엔 소위후보자(후보생) 제도를 설치해 준위나 병장, 선임부사관 등에서 우수한 인원을 뽑아 소위로 임관시켰다. [[1938년]]에는 [[일본육군항공사관학교]]가 설치되었다. [[1883년]]부턴 국립과 공립, [[1889년]]부터는 사립을 불문하고 [[구제고등학교|고등학교]] 이상의 학력을 지닌 자는 '1년 현역제'란 이름으로 예비 장교에 지원 가능했고 이 제도는 [[1927년]](쇼와 2년)부터는 [[갑종간부후보생]]이란 [[이름]]이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때는 갑종장교가 육사 출신보다 숫자가 더 많았다. [[1941년]](쇼와 16년)에는 특별지원장교 제도가 생겼다. 까놓고 말해 인원 딸리니까 제도를 늘린 것이다. [[학도 특별지원병 제도|나중엔 조선이랑 타이완에서까지 장교를 뽑았다.]] [[병역법/일본|1927년에 재정된 병역법]]에는 징병검사 결과로 만 20세 이상의 건장한 청년들을 갑종(현역) 제1을종(제1보충역) 제2을종(제2보충역) 병종(제2국민병역) 정종(병역면제) 무종(다음해 재검사)등 6단계로 나눴다. 갑종과 을종은 제1국민병역에 해당하며, 그중 제1을종은 [[기초군사훈련]]까지는 받도록 하였다. 현역 복무기간은 [[1927년]]까지는 2년 6개월이였지만 [[우가키 가즈시게]]의 군축으로 인해 2년으로 줄어 유지되었다. 현역 복무 후에는 예비역 5년 4개월과 후비역 10년이 있으며 이중에서 12년 4개월 까지를 보충역으로 계산하여 을종과 함께 동원 가능하도록 법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1933년]]까지는 징병제라고 해도 현역 징집률이 겨우 20% 밖에 안되었다. 일본군의 기본 군사 전략이 소수정예를 지향하는 것도 있지만, 그 소수를 차량화/기계화/중무장화 시킬 장비가 없는 상태여서 더 이상 뽑아도 어차피 소화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중일전쟁 발발로 엄청난 병력 소모가 있자 과거에는 군대에 안 가던 제1을종, 나중에는 제2을종까지 징집하여 1937년에는 징집률이 25%로 올라가고 1940년에는 무려 50%까지 올라갔다. 그럼에도 병력 부족 사태는 심각하였다. 특히 일본군의 병역제도는 평시에 상비사단 17개 체제로 짜여져 있는데 [[1938년]]까지 정확히 두배인 총 34개 사단 115만명으로 늘어 난다. 여기에 일본군은 평시에 비해 전시에는 사단 병력이 2배로 늘어 난다. 결국 평시에 비해 딱 4배의 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는 현역 2년외에 예비역 5년 4개월을 전부 동원해서 복무해도 평시 병력은 3.67배 밖에 안되어 부족하다. 그렇기 때문에 을종까지 동원하여 전시 34개 사단 병력을 채우게 되었다. 그중에서 제2을종의 경우 아예 군사교육을 해놓지 않았기 때문에 ‘임시 소집’이라는 이름으로 사단 병력을 보충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 기존의 소수 정예제에 비해 질적으로 떨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래도 [[병력]]이 부족하였다. 1939년에는 8개 사단 증설, 1940년에는 7개 사단, 1941년에는 2개 사단이 증설되어 총 51개 사단 210만명이 되었다. 결국 [[1939년]]에 대량소집을 위한 법개정이 이루어져 기존의 보충병역 12년 4개월이 17년 4개월로 연장되었다. 최고 38세의 [[남성]]까지 소집이 가능해졌다. 다시 말하자면 예전에는 도저히 [[군인]]으로 써먹을 수 없던 체격과 [[나이]]까지 소집되어 질적으로 심각하게 떨어지게 된다. 거기다 현역들이 예비역들을 [[사람]] 취급 안하고 개무시 했다.[* 대충 따지자면 1등 군인 [[현역]], 2등 군인 [[예비역]], 3등 군인 [[조센징]]이다. [[여명의 눈동자]]를 보면 오오에 오장([[장항선]] 분)이 주인공 최대치([[최재성(배우)|최재성]] 분)가 조센징이라고 각종 학대를 하는데, 옆에서 덤으로 구박 받으며 개무시당하던 [[중년]] 남성이 바로 후비역 구보다([[박인환(배우)|박인환]] 분)이다.][* 다만 이것도 예외는 있어서 이미 현역 복무를 끝낸 이후 사회 생활을 하다가 대전 말기에 보충병 형식으로 소집된 많은 예비역/후비역 상병장 출신들이 아직 사회 경험이 부족한 농촌 출신 징집병이 대다수를 차지하던 현역 상병장들을 무시하는 경향도 있었다. 이는 [[이오지마 전투]]를 다룬 영화인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에서도 과거 헌병이었다가 상관의 명령을 거역해서 퇴출된 바람에 주인공 부대로 전입 온 현역 상등병이 주인공을 포함한 다수의 예비역과 후비역 출신 소집병들에게 무시당하는 것이 잘 반영되어있다.] 태평양 전쟁 말기인 [[1944년]]에는 이래도 부족하여 징병연한을 20세에서 19세로 낮추고 현역 징집률을 '''77.4%'''까지 올렸다. 이 과정에서 당시 [[식민지]]였던 [[조선]]과 [[대만]]에서도 징병제를 실시해 조선인과 [[대만인]]도 징집했다. 육군 총병력은 99개 사단 420만명에 달했다. 덕분에 이미 심각하게 상태가 안좋았던 1941년과도 비교도 안되게 질적으로 심각하게 떨어지는 상태가 된 것이다. 장교 부족도 심각하여 [[1939년]]의 경우 전체 장교 60,700명에서 [[소좌]] 정원 7,366명중 4,231명(57.4%)만 채우고, 대위는 더 심각하여 정원 18,597명중에 7,191명(38.7%) 밖에 안되었다. 게다가 채워진 인원들도 상당수가 예비역 장교로 1939년 기준으로 현역 비율은 36% 밖에 안되어 소좌가 83.1%, 대위가 77.7%, 중소위의 경우 겨우 21.2%였다. 그바람에 본래 소좌가 맡아야 할 [[대대장]]을 대위가, 대위가 맡아야 할 [[중대장]]을 중소위가 맡는 것이 보통이였다. 덕분에 이전까지처럼 진급시킬때 [[연공서열]]따위에 목을 메던 것도 사라지며 중위 임관한 장교가 1년만에 소좌가 되는 경우까지 생겼을 정도였다.[* 해군의 예지만, 나중에 [[일본 총리]]까지 지낸 [[나카소네 야스히로]]가 그 케이스였다.] 평시, 아니 태평양전쟁 초반, 아니 [[1944년]] 전만 해도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1945년에는 육군 전체 [[장교]]가 25만명 까지 늘어났지만, [[현역]] 장교 비율은 무려 19%까지 떨어 졌고, 정원 충족률도 74%까지 떨어진다. [[대대장]]([[소좌]]), [[중대장]]([[대위]])의 경우 현역은 20~40% 정도였으며, 정원 충족률은 겨우 70% 정도였다. 장교 1인당 사병의 수는 39년에는 17.5명이었지만, 1945년에는 24.6명에 달했다. 같은기간 [[미 육군]]은 39년에는 12.1명, 1943년엔 11.1명, 1945년엔 8.3명으로 오히려 장교 비율이 점점 올라갔다. 참고로 미군은 39년 총병력 10만명에서 1945년엔 1,000만명까지 늘어났다. 즉 일본이 추구하는 ‘소수정예’는 오히려 미군에게 붙여줘야 할 명칭이였다. [* 정확히 말하면 ‘다수정예’라 볼 수 있다.]이런 상황에서 진급도 속성으로 이뤄지게 되면서 [[1939년]]에 [[졸업]]한 육사 52기 생들이 [[1944년]]에 딱 5년 장교생활 하고 소좌를 단 인원들이 있었고, [[1933년]] 졸업한 1912년생 중좌가 있을 정도였다. [[20대]] 소좌와 [[30대]] 초반 중좌라는 건 태평양전쟁 초기만 해도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하사관]] 선발은 대부분의 [[국가]]와 마찬가지로 민간에서 바로 받지 않고, [[병사]] 중 우수한 자원을 선발하여 임명하였다. 일등병 중 상등병 진급이 될 만한 대상인 상등병후보자를 뽑은 후 상등병후보자특별교육을 실시, 그 적임자로 상등병 진급자를 뽑고, 그 중 오장이 되기를 원하는 자나 전역한 후 하사관에 지원하는 자들[* 이 경우는 일등병 전역자도 지원은 가능했다.] 중에 선발해서 1년동안 육군교도학교나 아니면 각 부대의 하사관 교육 기관에서 1년 교육 후 오장이 되었다. 그리고 4년동안 근무가 가능했고, 그 뒤는 재임용 신청을 해야 하는데 이 경우 근무성적이 좋지 않다면 안 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그때도 사람사는 건 비슷하듯, 경기가 좋을 때와 안 좋을 때의 지원자 상황이 천차만별이었다고 한다.] 다만 특수한 직렬의 경우는 [[한국]] 같은 [[민간부사관]] 비슷한 제도가 없는 건 아니었는데, 육군 항공비행학교나 정비학교 졸업생의 경우는 상등병 임관 후 6개월에서 1년 정도의 수습단계를 거쳐서 오장으로 임용하기도 했고, 헌병 등의 분과에서는 시험을 쳐서 훈련병 중 괜찮은 인원들을 상등병으로 임용시키기도 했다. 뭣보다도 [[도시]]의 배운 사람을 현역병으로 받아들이기 무서워했던 일본군 특성상 '예비역오장' 이라는 특이한 제도도 있었는데 [[구제중학교]] 졸업자를 대상으로 '[[을종간부후보생]]' 이라는 걸 뽑아서 훈련을 시킨 다음 예비역에 편입, 병역의무를 마치게 만드는 제도였다. 그리고 전쟁이 한참 지속되면서는 하사관 부족해지자, 아예 신병훈련을 받을 때 일정 학력 이상의 병사들을 대상으로 평가를 봐서 임용 시 계급 자체를 다르게 주기도 했다. 병사 계급은 이등병과 일등병, 상등병으로 구성됐으며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40년]] [[9월]]에 [[병장]]이 신설됐다.[* 그 이전에는 오장근무상등병이라 해서 내무실 전체를 책임지는 병사가 있었는데, 이 인원들을 병장으로 승진시켜준 것. 여명의 눈동자에서 오오에가 오장계급을 달고 내무반에서 같이 생활하는 모습이 보통 일본군의 모습은 아니었다. 오장부터는 병사들과 다른곳에서 생활했고, 이게 원래부터 장교와 그 아래 간에 간극이 심했던 일본군에서 하사관과 병사의 간극까지 심해져 문제가 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일병까진 대체로 그냥 올라갔지만 상등병은 중대 당 1할의 인원 제한이 있었고, 진급은 시험 등 검열로 이뤄졌다. 일본 육해군 병사/[[수병]] 계급은 무조건 근속년수로만 올라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계급이 높다고 꼭 선임인 것은 아니었으며, 후임이라도 먼저 진급하면 상하가 뒤집혀 이전에 자신을 갈구다 후임이 된 선임에게 [[복수]]를 하는 경우도 의외로 많았다. 또한 상등병으로 선발되어야 헌병이나 [[통신병]] 등 고급 기술을 배우거나 권한이 많거나 편한 특기를 재배정받을 수 있었기에 많은 병사들이 진급을 위해 노력했고(밤에 이불 뒤집어쓰고 손전등 켜서 공부했다는 수기도 있다. 애석하게도 수기의 주인공은 진급에 성공한 뒤 미군에게...), [[고향]]에서도 전역시 상등병이나 병장 전역자([[1940년]] 이전에는 오장 이상 전역자)라면 거의 [[가문의 영광]]급으로 우대를 받았다. 특히나 일본군 하사관이라는 건 지금 우리나라 [[군대]]와는 다른 점이 있어서, '장교가 아니지만 군에서 근무하는 인원' 이라는 의미보다는 '징집병 입대자들 중에서 무척 우수하다고 평가받은 인원' 이라는 의미가 강했고[* 그러다 보니 우리가 생각하는 [[30대]] 후반이나 [[40대]]의 [[상사]] [[행보관]], 50세가 다 되어가는 [[주임원사]]나 [[준위]] 등을 당시 일본군에 그대로 대입하면 오류가 생긴다. 당시 일본군 하사관이라는건 어디까지나 징집병 생활의 연장선상이었고, 그러다 보니 나이들도 [[20대]]가 대부분이었다. 상사에 해당하는 조장이나 일본 육군 준위들의 나이도 저 정도로 젊었다. 애시당초 일본군 하사관의 [[정년]]은 40세였다. 그것도 준위를 달아야 그 때까지 일할수 있었다.][* 엄밀히 말하면 하사인 오장이나 중사 정도에 해당하는 군조의 경우는 현 한국 [[부사관]]들보다 [[승진]]이 어렵고 나이도 조금 더 많은 편이지만 그 만큼 대접이 확실한 편이었고 조장으로 진급하는 시기는 [[한국군]]의 상사 진급보다 조금 빠르긴 해도(보통 [[20대]] 후반 정도라고 한다.) [[중대]] 1인 정도로 진급 가능성 자체는 굉장히 적고 한국군의 상사들처럼 오래 근무하지도 않기 때문에 숫자도 무척 적은 편이었다. 애시당초 조장이나 그 위의 준사관인 준위(해군의 경우는 병조장)의 경우는 이등병에서부터 군생활로 올라온 인원들도 있지만 항공이나 의무 같은 특이한 특기가 있거나 아니면 [[사관생도]] 과정 중에 임관 전 임시로 임용되거나 한 인원들도 있어서 일률적으로 말하기는 힘든 계급이다. 전쟁 말기쯤 가면 하사관 계급의 연령 분화가 극과 극으로 더 심해지는데 20대 중반에 초고속으로 군조나 조장을 단 인원들도 있는가 하면, 예비역이나 후비역으로 징집된 나이 많은 오장이나 군조, 조장들도 존재했다.], 일본사회 자체가 군국주의화 되기 전부터도 군대나 [[사회]]나 크게 다를 바가 없어서, 군대에서 적응 잘 하고 인정받은 인원이라면 사회에서도 그럴 수 있는 사람으로 충분히 통했기 때문에 저런 측면이 강했다. 당장 실질적인 이점들이 있어서 하사관 전역자라면 경찰 채용이나 [[공무원]] 채용 등에서 직접적인 우대를 받았고, 다른 곳에 취업하기도 굉장히 유리한 편이었다.[* 이를테면, 당시 일본 시골이나 소도시 같은 곳에 있는 마을 일을 돌보는 일종의 [[마을회관]]이나 [[동사무소]] 같은 곳에서 일정한 댓가를 받으며 일하는 인원들이 있었는데, 상등병이나 오장 전역자들이 도맡아서 하곤 했다. 마을 청년회 회장 같은걸 일정한 수당을 받고 하는 셈인데, 나름 동네 [[청년]]이나 [[청소년]]들의 지도자 취급을 받는 자리였고, 그래서인지 마을에서의 대접도 꽤 괜찮은 일자리였다고 한다.] 또 오래 복무한 하사관들의 경우는[* 그래봐야 요즘 육군 부사관들같은 정도가 아니라 6년차 퇴역,12년차 퇴역 뭐 이런 정도였다.] 퇴역시 소정의 은사금이 나오기도 했는데, 이게 [[시골]]에 [[땅]]을 좀 마련할 수준은 되었다고 한다.[* 요시다 유타카의 '일본의 군대'라는 책에 따르면 군생활 6년 한 하사관은 퇴직 일시금으로 120엔을, 10년 한 하사관은 퇴직 일시금 360엔을 받았으며 군생활 12년 하고 군조 전역시는 은사금으로 연 100엔, 조장 전역시는 연 112엔을 매년 받았다고 했다. 저때 당시 공무원들 월급이 20원이네 30원이네 40원이네 하던 시대였다.] 다만 시골출신들이 많고, 아무래도 배우거나 부유한 [[집]]의 자제들이 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